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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름 짓기, 여자, 남자, 평민, 양반의 자와 호 아명 관명

by sk1st 꽃 나무 별 2023. 8. 1.

목차

    재미로 조선시대 이름 짓기:

    태어난 달과 날을 가지고 조선시대 이름 짓기를 해보세요. 아.. 제 이름은 순구입니다. 전...

    이건 조금 다른 버전입니다. 제 이름은 맹렬이네요.

    이쯤 되면 이걸 만든 사람들이 그저 웃자고 만든 게 확실한데 뭔가 좀 악의 적이네요. 여기서 제 이름은 똘봉입니다.

    이건 조선시대 이름이 아니라 인디언식 이름 짓기 같네요. 빌어먹을 배곯던 노비들의 왕이었습니다.

    기왕 재미로 조선시대 이름 짓기를 해 본 김에 진지하게 조선시대 이름 짓기에 대해 자세하고 진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제 다른 블로그 방문자 유입을 살펴보던 중 놀랄만한 자료 하나를 보았습니다.

    이름 짓기, 이름 짖기 맞춤법 올바른 것은?

    의외로 '조선시대 이름짖기' 검색량이 '조선시대 이름짓기'만큼이나 많았습니다. -짓기가 올바른 맞춤법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문해력이나 어휘가 무식할 정도로 떨어진다더니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이름 짖기라뇨? 짖습니까? 그래도 저는 그 '조선시대 이름짖기'라고 검색하는 분들마저도 제 글로 잘 들어오시라고 이만큼 글을 할애했습니다.^^;;;

    서론 - 조선시대 이름 짓기

    조선시대는 1392년부터 1897년까지 505년간 지속된 단일 왕조로 상당히 긴 시대를 이어간 나라였습니다. 이 시대는 다양한 계층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이름 짓는 방식이 저마다 다르게 적용되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는 왕, 양반, 평민 그리고 노비들의 조선시대 이름 짓기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이름 짓기

    왕이 제일 높지만, 조선시대 왕이래봐야 500년 역사 통틀어서 26명밖에 없으니, 좀 뒤로 빼겠습니다. 인구수는 평민 노비 합친 것보다는 적지만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으니, 사대부인 양반의 이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저도 양반집안사람이거든요??? ㅋㅋㅋ. 조선시대 양반들은 정식 이름인 관명(冠名) 이외에도 '자(字)'와 '호(號)' 등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막 부르는 아명도 있었지요.

    '자(字)' 이름:

    조선시대 양반들은 성인 남자의 한자 이름을 '자(字)'라고 합니다. 양반들은 관례를 올린 후에 새로운 이름인 '자'를 받게 됩니다. 이 자는 마치 이름의 아바타처럼 작용하는 별명(닉네임)처럼 자신의 성품이나 가치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자는 한자 모양을 봐서도 알겠지만, 조선시대에는 성년이 된 남자만 받았습니다.

    조선시대 남자는 20살이 되면 상투를 틀고(字)를 받습니다. 여자는 15세에 비녀를 받고 계례를 올리면서 성인식을 치렀으며, 여자에게는 자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에 대해서는 좀 더 뒤에 다루겠습니다. 양반들은 자를 받을 때에는 주로 뜻이 비슷한 한자로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의 뜻이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이름을 선택하는 것이 조선시대 양반들의 관습이었습니다.

    '호(號)' 이름:

    조선시대에는 상대의 본명을 부르는 것은 대단한 결례였습니다. 때문에 자나 호로 불렀으며, 왠만하면 자대신 호를 사용했습니다. '호'는 자신이 직접 짓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부여받은 별명 또는 호칭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름은 평소에 자주 사용되거나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불렀습니다.

    호는 개인의 성격, 특징, 좋아하는 것, 거주지, 관직 등과 관련하여 친구나 스승이 지어주는 별명으로 자유롭게 작명되며, 성격을 표현하거나 특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친구 1도 없는 아싸가 자기 별명을 자기가 지으면 자호(自號)라고 하며, 양반들은 자신에게 호를 가질 때 흔히 쓰는 방법 중 하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자와 호

    참고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는 여해(汝諧)입니다. 이 자는 이순신 장군의 어머님께서 『서경(書經)』에 나오는 순(舜) 임금의 “오직 너(汝) 라야 세상이 화평케(諧) 되리라”는 말에서 뜻을 취해지어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 붙는 충무공이 호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충무공이라는 것은 살아생전의 업적으로 추존되는 시호입니다. 살아 있을 때 자신의 시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도 본인이 충무공이 될 거라 짐작은 했겠으나,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몇백 년 전에 돌아가신 이순신 장군의 호는 몇십 년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가상의 호를 사용했고, 그중 몇몇은 워낙 이순신장군에 대해서 찐심인 덕후급 소설가나 연구가에 의해서 지어진 호로 알려진 시기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위키백과에조차 엉터리 호인 기계(器溪)가 병기돼 있습니다. 소설 임진왜란 작가 김성한 씨는 덕곡(德谷)이라는 호를 지어냈습니다.

    서원겸사기(書院兼史記)’란 필서본(筆書本)에이 1987년 공개되면서 이순신 장군의 아호(雅號)가 덕암(德巖)이라고 밝혀졌습니다. 이미 40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이순신 장군의 호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충무공으로 불립니다.

    아래는 자, 호, 휘, 시호, 묘호, 휘호 등에 대해 설명한 다른 글입니다.
     

    충무공 이순신 자 호 휘 차이, 세종 고종 묘호 시호 뜻 존호 능호

    자(字) 휘(諱) 호(號) 시호(諡號) 존호(尊號) 묘호(廟號) 능호(陵號)의 정의와 차이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자, 휘, 호, 시호, 존호, 묘호, 능호는 이름과 관련된 다양한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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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왕 이름 짓기

    조선시대 왕의 이름은 휘(諱)라고 불렀습니다. 아 물론 조선시대에만 그런 것은 아니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한반도 국가에서는 대체로 휘(諱)를 썼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은 대체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왕위 계승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이름과 휘(諱)가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적통 원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왕자가 태어날 때에는 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적통의 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상당수가 중전 소생이 아닌 후궁 소생이거나, 정변을 통한 찬탈, 후계가 없어서 방계 왕족의 세습이 상당수를 차지했습니다.

    따라서 왕이 되면서개명을 통해 휘를 정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반 상호 간에도 이름을 부르는 것이 금기시되다시피 한 유교탈레반 사회인 조선에서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적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 할 행위였습니다. 때문에 왕들도 웬만하면 자신의 이름에 쓰인 한자가 사회에서 못 쓰이는 일이 없도록 뜻은 좋지만 잘 쓰지 않는 한자를 찾아서 휘를 지었습니다. 이를 피휘(避諱) 또는 기휘(忌諱)라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이 피휘 된 글자를 써야 할 때는 알아볼 수 있는 선에서 일부러 획을 빼먹기도 했습니다. 이를 피휘결획(避諱缺劃) 혹은 피휘궐획(避諱闕劃)이라고 합니다. 읽던 사람이 알아서 소리 내지 않고 아 이게 임금의 존함이구나 알게 한 것입니다.

    참고로, 고종의 자는 "재황(載皇)"이었습니다. 아명은 명복이었으며 더 어릴 때는 심지어 "개똥이"로 불렸습니다. 왕이 될 줄 몰랐던 몰락한 왕가였거든요. 군밤을 좋아하던 개똥이는 왕이 되기 전에 잠깐 "재황"이라는 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될 때는 왕의 이름인 "휘(諱)"인 형(㷩), 희(熙)를 받게 됩니다.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휘를 2개 가졌던 왕입니다. 그리고 이름도 제일 많았습니다. 휘가 2개인 까닭은 그가 최초의 대한제국 황제였기 때문입니다. 즉 조선시대 왕일 때 휘, 대한제국 황제일 때 휘 이렇게 2개를 가진 것이죠. 나라 말아먹으면서 별명도 참 많았던 사람이었네요.

    조선시대 왕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해보세요

    조선시대 평민 이름 짓기

    초기 조선시대 평민들은 대개 한자식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쉬운 한글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성과 한자 이름을 가진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평민이라하더라도 천것이 아니었으며,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일 수도 있었고, 방계 왕족 중 찢어지게 가난한 이도 있었으며, 양반가문의 서자의 후손도 일반 평민으로 살아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름들은 주로 화성성역의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된 평민 일꾼 이름

    신체 특징으로 이름 짓기:

    평민들은 어릴 때, 신체적 특징에 따라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키가 크면 '박큰노미', '최큰노미'와 같이 큼직한 도자기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키가 작으면 '김자근노미', '임소남', '김작은북', '구작은쇠' 같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다리길이가 짧은 사람에게는 '조조자근노미'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돌' 자가 들어가는 이름:

    '-돌' 자는 장수를 기원하면서 '돌'자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안길돌', '박볼돌', '서귀돌', '김일동' 등이 그러한 예시입니다.

    조선시대 노비 이름 짓기 - 성(姓) 없이 이름만 가진 사람들

    조선시대 노비들의 이름은 성(姓) 없이 이름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노비들은 주로 노비의 주인이나 부모가 이름을 지어주게 되었습니다. 주인들은 노비들에게 물건, 계절, 동식물의 이름 등을 사용하여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이름은 족보에서 명확하게 이름이 드러나지만, 노비나 평민의 경우에는 족보가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름은 주로 노비문서나 불경 시주질에서 자료를 찾을 수 있으나, 한자로 변환돼서 정확한 이름을 알기는 힘든 경우가 많았습니다.

    훈민정음 반포 후에는 노비들의 이름이 한글로 잘 쓰였습니다.

    하지만 훈민적음 반포후 김수온에 의해 쓰인 내불당낙성기인 '사리영응기 (舍利靈應記)'에 총 47명의 이름이 한자로 된 성시와 함께 한글이름이 적혀 있어서 당시 시대 사람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사리영응기에 나온 한글로 쓰인 우리말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막동, 타내, 올마대, 오마디, 오마대, 오망디, 오미디, 쟈가둥, 마딘, 도티, 고소미, 매뇌, 가리대, 올미, 더믈, 샹재, 검불, 망오지, 수새, 쇳디, 랑관, 터대, 흰둥, 우루미, 어리딩, 돌히, 눅대, 아가지, 실구디, 검둥, 거매, 쟈근대, 북쇠, 은뫼 등 성을 한자로 적었으나 이름을 한글로 적은 이유는 이들의 이름이 고유어식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저의 다른 블로그에 작성한 순우리말 이름 짓기입니다.
     

    예쁜 한글 순우리말 이름 좋은뜻 짓기

    예쁜 한글 순우리말 좋은뜻 이름 짓기 한글은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순우리말로 불리는 한글은 외래어나 한자가 아닌 고유한 한국어 낱말을 말합니다. 한글 이름은 순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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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여자 노비 이름짓기

    TV 사극을 보면 여비로 묘사되는 노비들은 '큰년이', '작은년이', '막순이', '덴년이', '삼월이'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 이름은 아마 큰년이는 커서, 작은년이는 작아서, 막순이는 아들을 기원하는 의미로, 덴년이는 데인 곳이 있어서, 삼월이는 3월에 태어났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노비들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한글 이름으로 쉽게 부르다가 부장기, 매매문기, 호적 자료 등에 등재되면서 한자를 차용하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도 혼인 이후에는 본관+성씨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족보에도 이름이 오르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확한 조선시대 여자 이름에 대해서 알려진 사료가 많지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아는 조선시대 여자 이름은 그게 거의 전부라고 봐도 별 차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노비인 여비의 경우 재산으로서 부세 부담자로서 관련 문서에 등재되어 이름이 쉽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비의 이름들은 인성(人性)보다는 물성(物性)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노비명은 남녀 모두에게 단산기원(딸은 그만 낳자), 더부살이, 도구, 동물, 소유, 암석, 아무개, 외모 등의 의미가 공통적으로 드러났으며, 남노의 경우 똥이나 성기와 관련된 고유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반면 여비명에서는 일정한 금기가 존재했습니다.

    경상도 대구부 호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노비 이름으로는 남노(男奴: 남자 노비) 이름 23,041개와 여비(女婢: 여자 노비) 이름 37,944개가 추출되었습니다. 이들 노비명 중 여비 이름에서는 30회 이상 등장하는 이름만 5,018개로 전체의 13%를 차지합니다.

    경상도 대구부 호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남노(남자 노비) 이름 23,041개와 여

    비() 이름 37,944개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 노비명 중 여비 이름에서는 30회 이상 등장하는 수효는 5,018개로 전체의 13%를 차지합니다. 이 중 가장 많은 빈도를 가진 여비 이름은 "조시(助是, 조이)"로 총 2,633회 등장하며, 다음으로는 "소사(召史, 조이)"가 437회, "막랑(莫郞)"이 230회, "조시(早是, 조이)"가 215회, "막녀(莫女)"가 130회 등이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자은연(自은連은, 작은년), 건리덕(件里德, 견리덕), 막례(莫禮), 막심(莫心), 막내(莫乃), 강아지(江牙之), 잉녀(芿女, 늦녀), 막절(莫切), 아지(牙只, 아기), 개덕(介德), 건리개(件里介), 개이(介伊, 개이), 잉절(芿切, 늦절), 막조시(莫助是, 막조이), 잉단(芿丹, 늦단), 막금(莫今), 막진(莫進), 말질례(末叱禮, 긋례), 개진(介進), 잉질분(芿叱分, 늣분), 감덕(甘德), 막춘(莫春), 자금(自今, 쟈금), 자음덕(者音德)(芿叱德, 늣덕), 잠심(岑心), 개분(介分) 등의 순으로 많이 사용됐습니다.

    이들 노비명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일반적으로 인성(人性)보다는 물성(物性)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들 노비명에는 단산 기원, 잠과 관련된 의미, 동물 비유, 외모와 관련된 의미, 암석 관련 의미, 소유와 관련된 의미, 도구와 관련된 의미, 더부살이와 관련된 의미, 장소를 나타내는 의미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남노명과 여비명의 차이점으로는 남노명에서는 똥이나 성기와 관련된 고유어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었지만, 여비명에서는 일정한 금기가 존재하여 이러한 내용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노비명은 남녀 모두에게 단산 기원, 더부살이, 도구, 동물, 소유, 암석, 아무개, 외모 등의 의미가 공통적으로 나타남으로써 노비들의 사회적 현실과 역할을 반영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결론

    조선시대에는 평민, 양반, 노비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방식과 사회관계에 의해 다양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후기 조선에서 평민들도 한자식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양반들은 관명 이외에도 '자'와 '호'를 갖고 있었습니다. 노비들은 주인들의 의도에 따라 물건, 계절, 동식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러한 이름 짓기 문화는 당시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다양한 이름들이 살아 숨 쉬는 조선시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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